한국가곡

'고향'과 '향수'의 시인 정지용 1

내마음의노래 2024. 6. 5. 22:48

고향 (정지용 시/ 채동선 작곡)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운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지니지 않고
먼 하늘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한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운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https://youtu.be/EMFYG_q5gMk

소프라노 조수미

 

 

1936년 작곡가 채동선이 당시 나라잃은 설움을 달래기 위하여 독일 유학중에 멜로디를 착상한 곡으로 향수의 그리움도 함께 담겨진 곡이다. 어린시절의 추억, 고향마을의 이미지는 시 작품의 소재가 되어 있거니와 우리의 땅이 분단된지도 사반세기를 넘고 있어 가고 싶어도 못가는 나의 잃어버린 고향이다. 울적한 마음이 견딜 수 없을 때 문산리의 임진각으로 찾아가 철책 너머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지나 저 먼발치 이북의 땅과 산마루와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한다.


이 시는 암울했던 한국 근대사에서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음악가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채동선의 대표적 가곡, '고향'의 노랫말이다. 작사자는 한국 문단사에 빛나는 거목으로서 큰 자리를 차지했던 정지용이다.
이 곡은 고향에 대한 애절한 감성을 서정성 깊은 선율로 노래하면서 오랫동안 나라 잃은 우리 민족에게 깊은 위로를 주었다. 하지만 이 곡은 도중에 박화목 작시의 '망향' 또는 이은상 작시의 '그리워' 소프라노 이관옥이 쓴 '고향 그리워' 등으로 노랫말이 바뀌어져 불려야만 했던 '비운의 가곡'이었다.

 

망향 (박화목 시)

 

꽃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이 마음은 푸른산 저 넘어
그 어느 산 모퉁길에
어여쁜 님 날 기다리는 듯
철 따라 핀 진달래 산을 덮고
먼 부엉이 울음 끊이잖는

나의 옛 고향은 그 어디런가
나의 사랑은 그 어디멘가
날 사랑한다고 말해 주렴아 그대여
내 맘속에 사는이 그대여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들 것 일레라

 

https://youtu.be/xWwlTsWkuMg

테너 신인철

 

 

그리워 (이은상 시)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내님은 아니뵈네
들국화 애처롭고
갈꽃만 바람에 날리고
마음은 어디고 붙일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본다네
눈물도 웃음도 흘러간 세월
부질없이 헤아리지 말자
그대 가슴엔 내가
내가슴에는 그대있어 그것만
지니고 가자꾸나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서
진종일 언덕길을 헤메다 가네

 

https://youtu.be/ewjmQ6S3-MM

소프라노 곽신형

 

고향 그리워 (이관옥 작사)

 

내 정든 고향을 떠나와서
낯설은 타향에 외로운 몸
저 멀리 안개속에
그리운 얼굴 뵈는 듯
찬바람 불어오는 언덕에 앉아
먼 하늘만 바라 보노라

내 사랑 그리운 고향 땅아
언제 나를 품어 주려는가
아련한 꿈 속에 옛노래 그리워 불러보네
아! 언제 가려나 내동산에

내 정든 고향을 떠나와서
아득한 하늘 바라 여기 서 있노라

 

https://youtu.be/gZjs5SdUh9I

소프라노 이관옥

 


전쟁이 끝난 후, '고향'의 작가 정지용이 6·25때 월북한 시인으로 낙인찍혀 금지가곡으로 묶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가곡 '고향'은 이미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린 상태였고, 당시 출판된 명곡집에 예외 없이 수록되는 인기가곡이다 보니까, 각 출판사들은 급한대로 박화목의 '망향'으로 그 가사를 대신하였고, 후에 정지용의 시를 텍스트로 한 채동선의 모든 가곡을 다른 가사로 바꾸는 작업에 들어가면서 '고향'의 가사는 노산 이은상 '그리워'로 대체된다.
지금의 4·50대 중장년층에게 특히 잘 알려진 이 곡이 '그리워'란 제목으로 더욱 잘 기억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이 곡이 본래의 노랫말을 되찾은 것은 1988년 정지용을 비롯한 월북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내려진 이후였다. 1993년에 발간된 채동선 작품 제2집에는 9편의 정지용 詩가 모두 제자리를 찾아갔다.   
단조의 화성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우울한 분위기의 이곡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한을 담고 있는 곡으로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채동선은 1901년 6월 11일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에서 아버지 채중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선무역회사'를 경영하며 벌교의 이름난 부호였던 채중현은 현재 벌교 남국민학교에 송덕비가 세워져 있을 만큼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공익사업에 힘을 기울인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도 남달라서, 어린 채동선은 여덟 살 때까지 벌교에서도 수십리 떨어진 순천공립보통학교까지 때로는 걸어서, 때로는 어른(머슴)들에 업혀서 통학을 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로 올라와 제일고보(현 경기고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 시절에 채동선은 학업에 열중하면서, 뜻이 맞는 친우들과 함께 조국의 장래에 대한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는 등 민족의식에 대한 투철한 이념을 고취시켜 나갔다. 채동선의 이러한 자세는 훗날 그의 음악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로 작용하였고 이의 실천을 위해 평생동안 온 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이 시절에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를 듣고 그 소리에 매료된다. 슈만이 파가니니의 독주회를 듣고 법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음악가로서의 길을 결심하듯이, 선천적으로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채동선의 음악가로서의 길은 이때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급기야, 채동선은 홍난파에게 1년간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다. 장안에 바이올린 소지자가 4,5명이 채 안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음악가로서의 본격적인 정진은 유보된 상태였다.

 

한편, 경기고보 시절 뛰어난 학업 성적과 학우들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채동선은 1919년 '3·1만세사건'이 발발하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고, 왜경의 감시가 계속되자 아버지의 권유로 결국 4학년 때 경기고보를 떠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1924년 와세다 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게 된다. 물론 이 시절에도 채동선은 일본 바이올린계의 원로인 多忠朝 문하에서 4년동안 바이올린 수업을 계속하였다. 와세다 대학 졸업 후에는 잠시동안이지만 일본 교향악계의 개척자인 일본 교향악단에 입단하여 일본 각지에 연주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그후 채동선은 영문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잠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포기하고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하여 리햐르트 할체에게 바이올린을 그리고 빌헬름 클라테에게 작곡을 배운다. 그리고 1926년에는 -훗날 지금의 '베를린 예술대학'으로 확대개편되는- 베를린 '슈테른쉔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공부를 계속하였다.

 

1929년에 귀국한 채동선은 제2의 삶을 함께 하게될 부인 이소란 여사를 만나게 된다. 두사람의 만남은 채동선의 여동생인 채선엽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당시 이소란과 채선엽은 이화여중 동기로서, 나란히 이화여전의 영문과와 음악과에 진학하였고 주위에서 쌍둥이라고 부를 정도로 늘 함께 다니며 다정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채선엽은 이소란에게 늘 오빠 자랑을 하였고, 마침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 길에 오른 채동선을 두 사람이 마중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가 아마 초가을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원산항에 바로 도착하여 서울역까지는 기차로 온다더군요. 그래서 선엽씨와 함께 서울역에 밤 9시 30분에 마중 나갔지요. 그런데 독일에서 유학한 학생이라 해서 씩씩하고 야심에 찬 청년인 줄 알았는데 매우 수수한 사람이더군요"라고 부인은 당시를 회상하였다 (1931년에 이화여전을 졸업한 소프라노 채선엽은 1934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아! 목동아', '한 떨기 장미꽃' 등을 취입하였고, 1937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의 오사카 공회당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가졌는데, 당시 '아사이'신문에는 '精度에 들어선 유망한 예술가'라는 평이 실리기도 하였다. 1938년 귀국하여 부민관에서 귀국독창회를 가진 후 계속된 국내활동으로 그녀는 당대 최고의 인기성악가의 명성을 누린다. 채동선 집안의 음악적 소질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향수 (정지용 시/ 김희갑 작곡)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이든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에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https://youtu.be/Pu7zt2zadh0

테너 박인수와 이동원

 

'향수'가 고향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을 노래했다면, 정지용 초기 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고향'은 그와 같은 그리움을 안고 막상 찾아온 고향에서 느끼는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다. 자연의 모습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상실감으로 변모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공동체적 삶의 양상이 현실 속에서 피폐화된 채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측면은 이 시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이 시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시적 자아의 의식 속에서 구성된 고향의 이미지와 현실의 불일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고향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으로 인해 시적 자아의 의식 속에서 고향이 낭만적인 이상향으로 설정되었거나, 유년시절처럼 고향을 낭만적으로만 의식할 수 없을 만큼 현실 속에서의 시적 자아의 의식이 황폐화된 데서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이 시는 변함없는 자연과 인간사의 대비를 통해 고향의 상실감을 간결하고 담담한 어조에 담아낸 작품이다 특히 외적 요인에 의한 고향의 변모 양상보다 시적 자아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고향의 이미지와 현실적 모습의 차이를 문제 삼은 점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형태상으로 보면, 1연과 6연의 수미쌍관 구조는, '돌아와도/울건만/웃고/돌아와도'의 방임형 어미계열과 '아니려뇨/지니지 않고/아니나고/높푸르구나'의 부정형 어미 계열의 호응구조와 더불어 이 시의 기본적 구조를 이룬다. 이러한 구조상의 특성으로 인해 고향의 상실감이 자연과의 대비 속에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또한 이 시는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동원하고 있지는 않지만, 해방 직후 유행가로 만들어져 널리 애창되었을 만큼 정지용 특유의 속박한 리듬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러 갔구나

-정지용-

국토는 빼앗겨도 민족은 살아남지만 모국어를 잃으면 민족은 소멸된다. 일제가 우리 말과 글을 빼앗으려 한 것은 배달의 핏줄을 없애려 한 것인데 그 채찍을 맞으며 우리의 모국어를 날로 새롭게 씨 뿌리고 가꾼 시인들은 이 나라를 지킨 언어의 파수꾼이며 독립군이었다.

마땅히 초등학교에서부터 읽고 외야 할 지용의 시가 대학에서의 연구조차도 금지되어 땅 속에 묻혀 있음에 발만 구르던 문학동네에서 정지용 해금운동이 일어난 것은 1982년 6월이었다.
이희승.박화성.모윤숙.최정희.조경희.김동리.서정주.박두진.구상 등 문단인사와 이병도.이선근.방용구 등 학계인사 48인이 서명하여 당국에 정지용 저작물 복간을 진정한 것이다.
그 서명을 받으러 갔을 때 황순원은 "아무렴요 지용선생은 애국자이시니까요"했다.'애국자'라는 말 속에는 시인이 시로 바친 나라사랑의 뜻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 무렵 문공부의 소식통인 MBC의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지용 시인의 해금이 있을 것 같으니 방송출연을 준비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직된 5공정부는 공안부처의 불가론을 못이겨 끝내 6공정부로 공을 넘기고 말았다.

지용은 결코 스스로 북녘을 선택할 사람이 아님을 그를 잘 아는 문단, 학계, 언론계의 인사들이 만장일치로 증언하는 데도 미적거리다가 해금된 것은 1988년 3월 31일 노태우 새 정부가 들어서고 시인 정한모가 문공부장관에 앉은 직후였다.
해금 소식이 있자마자 지용시를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온 사람들이 모여 지용회를 만들었다.
회장에는 지용과 함께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았던 방용구(龐溶九)가 맡고 문단을 비롯한 사회 각계인사, 그리고 이화여전 제자들이 회원으로 참여하여 그해 5월 15일 지용의 생일에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제1회 지용제의 막을 올린다.

옥천문화원장 박효근이 참석했다가 시인의 부활제로 올린 시의 한마당에 감동하여 시인의 고향 옥천에서도 열어달라고 간청한다.
지용회는 서둘러 김남조 등 원로 중진 시인들과 당시 인기 절정이던 박경리 원작의 KBS드라마 '토지'의 주인공 최수지를 비롯한 출연진을 두 대의 관광버스에 싣고 6월 25일 옥천으로 내려갔다.
지용이 다니던 죽향(옛 이름은 옥천)초등학교 마당에 버스가 도착하자 정지용이 누군지도 모르는 어린이들과 시장거리의 아낙네들이 드라마의 주인공을 보려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옥천면 하계리 40번지, 1902년에 그가 태어나고 자란, 허름한 함석 지붕으로 바뀐 생가도 둘러보고 읍내 산언덕에 번듯하게 지어놓은 관성회관에서 지용의 시와 노래, 그리고 춤의 한마당이 벌어지니 5백 객석의 자리가 넘쳐나고 있었다.

지용회는 시 '향수'를 변훈과 김희갑에게 따로 작곡을 의뢰해 변훈 곡은 테너 임정근이 불렀고 김희갑 곡은 박인수, 이동원이 불렀는데 대중성이 앞선 김희갑 곡이 시와 더불어 높고 멀리 울려퍼져 '향수'는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불멸의 노래로 타오르게 되었고 옥천은 '향수'의 고장이 되었다.

저 시퍼렇던 유신정권의 끄트머리, 유신을 반대하는 문인.교수.언론인들이 송년회를 하던 자리에서 성래운 교수는 양성우의 시 '겨울공화국'을 암송했고 나는 '향수'를 소리 높이 외서 박수를 받았었다.
정지용을 읽지 못하게 하던 때 '향수'를 비롯한 시들을 외는 것이 자랑이던 나는 그 시가 노래로 불리면서 외야할 까닭을 잃게 되었다.
생전에 뵙지도 못한 내가 몇 해 전부터 지용회 회장을 떠맡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지용회를 이끌어온 김성우.김수남 두 명예시인이 할 일을 내게 미룬 것이다. 옥천에서는 해마다 지용제가 열리고 지용문학상도 제정되어 제1회 박두진 수상으로부터 14회까지 내려와 지난해 '정지용 탄생100년제'를 예술의 전당에서 올렸을 때는 김지하 시인이 수상했다.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정지용

"오랑캐 말은 북녘 바람에 기대어 울고

월나라 새는 남쪽 가지에 둥지를 튼다"고 옛 시인은 읊었다. 하물며 고향 하나로 평생토록 시의 우물을 길어올리는 시인에 있어서랴.

나라 빼앗기니 고향마저 잃게 되고,되찾은 나라 다시 두 동강이 되니 고향길 끊겨 '떠도는 구름'인 이 땅의 사람들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일찍이 잃어버린 고향을 시로 담아서 먼 후대에까지 가슴에 새기도록 남겨준 '향수'와 '고향'의 시인 정지용에게서 우리는 민족사의 비극과 그 통곡을 듣게 된다.

휴전이 되던 해인 1953년 중학생인 나는 대중잡지에서 모윤숙이 정지용을 구하기 위해 거제 포로 수용소에 가서 명단을 모두 뒤지고 북송포로 명단에서도 확인하려 했지만 끝내 못 찾은 안타까움을 마치 떠나간 연인을 부르듯이 절절하게 쏟아내는 글을 읽었다. 
그 글이 어린 내 머리 속에 심어준 것은 교과서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정지용이라는 큰 시인이 인민군으로 전쟁에 나가서 포로가 되어 북으로 넘어갔구나 하는 것이었다.

내가 어렵사리 얻은 '정지용시집'의 첫 장에는 '카페 프란스'가 나온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빗두루 슨 장명등/카페 프란스에 가자/이 놈은 루바쉬카/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저녁 명동의 술집 골목에서 저절로 흥얼거리던 그 시에 취해 루바쉬카를 입고 싶었다. 신문주간 표어 현상모집에 1등 당선한 상금 1만환을 들고 양복점에 찾아가 루바쉬카를 맞춰 입고 거리를 활보했었다.

시 창작 시간에 미당은 "에에 지용은 세 고개를 넘었지. 나는 한 고개를 넘었을까"하셨고,한 번은 공덕동 댁에서 갑자기 "근배야 지용은 내 큰 형님이시지. 지금도 저 북 쪽에서 쓰도똔똔 쓰도똔똔 신호를 보내오고 있거던…"하고 두 손가락으로 머리를 치며 간첩접선이라도 하는 시늉을 하여 어리둥절한 일도 있었다.

해방 공간에서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주도했던 김동리도 지용과는 자주 만나 속내를 털어놓는 사이였다면서 지용은 결코 북쪽을 택할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함께 끌려간 이광수는 납북이라 남쪽에서 책을 펴낼 수 있었고 지용은 북녘 땅에서 호강이라도 하는 양 오랫동안 꽁꽁 묶어뒀었는데, 재작년 2월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남녘땅에 계신 아버지 정지용을 만나겠다고 양강도 풍서방송국 책임기자로 일하는 작은 아들 정구인이 서울에 온 것이다.

인민군에게 잡혀간 아버지를 찾겠다고 집을 나섰다가 의용군에 끌려간 아들이 돌아왔는데 남에도 북에도 정지용은 자취가 없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던 곳"을 일제로부터 되찾으려고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로 목메게 부르던 '향수'는 이 나라의 산천에 울려 퍼지는데 그 시인은 어느 하늘에서 떠도는 구름이 되어 있는지.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