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심덕(1897-1926)은 평양 순영리에서 가난한 집안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러시아와 일본제국이 한반도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팽팽하게 힘을 겨루던 시기에 태어난 셈이었다. 아버지 윤석호는 심성이 곱다는 소문만 났을 뿐 가장으로는 생활력이 강하지 못해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나가다시피 하였다. 어머니는 일찍이 감리교회 신자가 된 인연으로 미국인 여의사 홀 부인이 운영하는 유명한 병원 광혜의원의 보조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광혜원은 윤심덕 어머니가 이곳에서 간호보조원으로 일하기 훨씬 전인 1900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점동을 탄생시킨 곳이기도 하다.
윤심덕의 어머니는 광혜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홀 부인의 영향을 많이 받아 생각과 사리를 판단하는 관점과 생활 습관이 서구적으로 개화된 여성이었다. 그 중에서도 교육에 대한 관심은 지나칠 정도로 높았다. 그러니 윤심덕은 남보다 먼저 개화의 눈을 뜨고 신학문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윤심덕은 열살이 되던 해에 진남포 보통학교 3년을 마치고 평양에 있는 숭의여학교를 거쳐 1918년에 현재의 경기여고인 경성여고보 사범과에 입학하였다. 사범과를 졸업하게 되면 보통학교 선생이 되는 자격이 주어졌다.
윤심덕은 훤칠한 키로 경성여고보에 다닐 때부터 많은 남학생들로부터 매력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다. 윤심덕은 가난하게 자랐지만 성격이 활달하고 아무에게나 말 붙이기를 좋아해 때로는 쓸데없는 입방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싹싹하고 친근한 여성이라는 칭찬을 더 많이 받았다. 그녀는 학교 다닐 때부터 유난히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어머니를 따라 어려서부터 감리교회에 나가 찬송가를 부른 까닭도 있겠지만, 윤심덕의 목소리는 유난히 크고 맑아서 그녀가 노래를 부르고 나면 주위 사람들은 으레 다시 한번 불러보라는 주문을 던지곤 했다. 게다가 학업성적도 항상 우등권에 들었다.
친구들은 윤심덕 만큼은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성적이 우수하여 평양보통학교 교사로 부임될 것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선 윤심덕을 원주공립보통학교로 발령을 냈다. 뜻밖의 일이었다. 윤심덕은 몹시 분개했다.
나보다 성적이 뒤떨어진 친구들은 오히려 평양이나 서울의 보통학교로 발령이 나고 그 사람들보다 성적이 월등하게 좋은 나는 무엇 때문에 벽지로 알려진 강원도 원주공립보통학교로 발령이 났을까 생각하며 며칠간 밥조차 먹지 못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얼마전 동창 모임이 떠올랐다. 그때 자리를 같이했던 총독부 학무국장이 몹시도 짓궂게 치근덕거려 신경질을 부린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일이 화근이 된 듯 싶었다. 원주에서의 교사 생활은 별 흥미도 없었다. 타고난 성격이 활동적이고 야망적인데다가 발령 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더욱그러했다.
"그래. 나는 이런 산골에서 여선생이나 해먹을 팔자는 아니야. 노래를 불러야 해."
윤심덕은 내심 일본 유학의 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윤심덕의 나이 열아홉 살 되던 해에 바로 그 기회가 돌아왔다. 어머니가 일하는 광혜의원 홀 부인의 주선으로 총독부 관비 유학생이 되어 일본으로 가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때가 1915년이었다.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그 무렵만 해도 한국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조차도 없을 정도로 교육의 과목이 다양하고 전문화되어 있었다. 서양미술이며, 음악이며, 연극이며, 세계 각국의 외국어며, 뜻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배울 수 있는 나라였다.
완고한 유교의 풍습으로 성악 공부는 기생짓, 그림은 환쟁이, 연극은 광대로 업신여기던 시절에 일본은 그런 분야를 거창하게 예술이니 문화 교육이나 하며 후진 양성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일본에 건너온 윤심덕은 먼저 아오야마학원에서 3년간 일본어를 비롯한 음악의 기초를 배우고 곧이어 동경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을 했다. 윤심덕의 동경음악학교 입학은 동경 유학생 사회를 흥분케 했다.
| 1920년대 중요한 연주활동을 살펴보면 어느 음악회이건 윤심덕의 이름이 올라 있다. 사실상 그녀가 출연하지 않으면 음악회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중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윤심덕의 모습과 이름이다. 1920년12월 19일 종로에 있는 YMCA홀에서 우에노 음악학교 동창회 주최로 열린 [베토벤 탄생 150년 기념음악회]의 목차를 보면 김합라, 윤성덕의 피아노연주, 윤심덕과 윤심덕의 남동생인 윤기성의 독창, 홍난파의 바이올린독주, 김영환, 한기주의 피아노독주 등을 볼 수 있다. 1923년 바이올리니스트인 계정식이 독일유학을 가기에 앞서 고별연주회가 있었는데, 여기 연주된 곡목은 헨델의 '소나타'와 사라사데의 '지고이네르바이젠' 등으로 당시 일본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돌아온 김영환과 윤심덕이 찬조 출연했다. 그해 7월7일 윤심덕의 제1회 독창회가 YMCA에서 열렸다. 그날도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모인 관객들 앞에서 하얀 드레스를 차려 입고 무대에 오른 윤심덕은, 약간 애수띤 음성으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녀의 창법을 듣는 사람들을 완전히 매혹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한 곡 한곡이 끝날 때마다 청중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정식 양악의 성악 교육을 받은 윤심덕의 노래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찌 여자의 목소리가 장내를 압도 할 것 같은 소리를 저렇게 낼 수 있을까?'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또 고음역에서 너무 미려하게 잘 넘어가서 청중들 가슴을 찌리하게 하면서 감탄을 연발하게도 만들었다. 1924년 5월11일에는 연희전문학교 음악회가 김영환, 홍난파. 윤심덕, 한기주등의 출연으로 개최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무대에서 초창기 우리 나라 음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윤심덕은 끊임없는 연주활동을 이어 가고 있었으며 귀국후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교사를 지내면서 음악발전의 일선에 서서 노력하기도 했다. |
윤심덕은 먼저 동경에 유학온 미술학도 나혜석과 함께 남자 유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서 국권을 회복하려는 한국인의 의지는 한시도 가만있지를 않았다. 마침내 3.1독립운동의 항일사건이 일어나고, 이런 여파는 일본 유학생들한테까지도 퍼졌다. 일본 유학생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국권을 찾으려는 데 열의를 쏟기 시작했다. 윤심덕이라고 해서 그런 열의에서 한눈을 팔 수 없었다.
1921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동경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동우회 순회극단>에 윤심덕이 적극 가담한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주요 맴버로는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재학중이던 김우진을 비롯해서 홍난파, 마해송, 김기진, 홍해성, 조명희 등 바로 음악과 문학을 전공하는 일본 유학생들이었다. 이 순회 극단은 여름방학이 되면 귀국하여 극단 활동을 통해 애국애족의 계몽을 전개하고 나아가 일본 압제로부터 독립하는 데 나름대로 한몫을 맡겠다는 목적 의식이 뚜렷한 모임이었다.
순회 극단은 당초 예정대로 마산, 경주, 대구 지방을 먼저 순회 공연하고 서울, 평양, 원산 지역의 공연에 앞서 김우진의 고향인 목표에서 공연을 가졌다. 호남 지역에서 유일하게 목포 공연을 갖게 된 이유는 이 극단의 자금줄이 김우진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잠시 김우진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그가 바로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서 정사했던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김우진은 장성 군수 김성규의 아들로 태어나 목포에서 성장하였다. 문학에 심취하여 일본의 구마모토농업학교와 와세다대학의 영문과 유학 시절에도 아예 전공학과보다는 시와 희곡분야에 더 열중하였다. 특히 그가 번역하거나 집필한 희곡 『찬란한 문』,『난파』,『산돼지』 , 목포 유달산 밑의 사창가를 무대로 쓴 『이영녀』등은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문예사상 표현주의 희곡들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항상 전통윤리와 새로운 서구적 윤리의 첨예한 갈등의 묘사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전통인습의 현실부정을 바탕으로 개혁사상을 강렬하게 주장하는 것들이었다. 남해안의 짭짤한 해풍과 함께 삼학도를 비롯하여 잘디잔 숲 섬들이 유달산 자락에 마치 춤을 추듯 매달려 있는 목포의 자연 경관은 일찍이 이곳 태생들을 예술인으로 낳고 기르기에 충분했다. 이 순회 극단의 성과는 대단하였다. 공연이 벌어지는 곳마다 흥분과 갈채가 뜨겁게 연출되는 예술 축제나 다름없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이 순회 공연을 통하여 사랑을 교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의 교감은 시작부터 불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때 김우진에게는 이미 처자식이 버젓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윤심덕은 순회 공연후 동경으로 돌아가 일년 더 음악수업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녀의 귀국은 금의환향이었다. 윤심덕이 귀국하자마자 때마침 우리나라 사람들의 순수한 자본으로 설립한 동아부인상회 창립 행사에, 그녀를 위한 음악 발표 무대가 특별히 마련되어 있었으니 그날 윤심덕의 음악 발표회는 초만원을 이루었다. 무대를 제압하는 늘씬한 키를 가진 그녀가 한없이 치솟아 오를 것만 같은 음성으로 노래의 기량을 발휘하자 한번 터진 박수 소리는 좀처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특히 이 공연을 본 사내치고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윤심덕의 이러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얼마전에 서대문구 정목 70번지로 이사온 그녀의 집안 형편은 어렵기만 하였다. 더군다나 동생 성덕이의 미국 유학 여비 문제까지 겹쳐 있어 돈에 대한 궁핍은 말이 아니었다. 한번은 동생의 유학 여비를 의논해 보려고 서울의 갑부 아들 이용문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 일이 잘못 알려져 윤심덕은 돈 때문에 애정을 헤프게 소비한다는 스캔들의 투망에 걸려들기까지 했다. 이 스캔들은 화려한 프리마돈나를 하루 아침에 매춘녀로 전락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수모나 다름없었다. 윤심덕은 이런 슬럼프를 극복해 보려고 만주로 건너가 어렸을 때부터 영신적 지도자로 모셔온 배형식 목사를 찾아가 잠시 목회를 돕고 돌아와, 목전의 궁핍한 생계를 타결해 보려고 영화배우의 길을 선택했다.
당대의 유명한 감독 이경손의 야심작 『동도』의 주연을 맡았다. 윤심덕은 이 영화의 주연을 맡고나서 낮은 코를 높이기 위해 성형수술까지 하는 등 대단한 열의를 보였다. 신문마다 『동도』의 상연 광고가 큼직하게 실렸다. 원작 각색 이경손, 주연에는 성악가 윤심덕, 배우 전원 총출연, 배경이 어떻고, 줄거리는 어떻고, 온갖 미사여구를 나열한 신문 광고에도 불구하고 흥행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니 영화배우로서 궁핍한 생계를 해결해 보려는 꿈도 흥행 실패와 함께 사라지고만 셈이었다. 그녀가 생계를 위해 이러저리 허둥댈 때마다 좋지 않은 추문만 무성하게 따라다닐 뿐이었고, 이런 것들이 누적될수록 그녀는 생에 대한 환멸과 비관을 한시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 무렵 목포의 김우진은 윤심덕을 자주 찾아왔다. 윤심덕의 괴로운 처지를 멀리서만 바라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김우진의 잦은 방문과 격려로 윤심덕은 그때마다 좌절과 실의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이화여전 음악과를 나와 음악 교수로 눌러 앉았던 동생 성덕이의 미국 유학이 결정되자 윤심덕은 여러 날을 고민하던 끝에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이유는 동생의 유학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에 가면 그전부터 전속 계약을 맺고 있던 닛토 축음기 회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에 동생의 유학 여비 문제로 명예에 치명적인 구설수를 당한 일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아예 레코드 취입 대가로 얼마간의 돈을 받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윤심덕이 노래 취입차 일본으로 떠나기 얼마전에 김우진은 이미 일본에 와 있었다. 전혀 약속된 일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윤심덕은 김우진을 일본 땅에서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윤심덕은 동경에 머물러 있는 김우진의 주소를 수소문하여 알아낸 다음 동생 성덕과 함께 부산의 관부연락선 편으로 일본으로 건너왔다.
| 김우진의 처 정점효는 ..... 윤심덕과는 달리 신식교육이란 것도 접해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직 전통적인 가정교육에 얽매어 살아온 김우진의 처 정점효는, 결혼은 했지만 남편의 사랑이라고는 한번도 받아 본적이 없이 그저 만석군의 지주집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전형적인 한국 여인처럼 묵묵히 시집살이를 하고 있었다. 신사상을 접한 남편은 얼굴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홀로 독수공방을 지킨 본처 정점호는 어떤일이 있더라도 여자는 가정을 지켜야되며 일부종사를 해야된다는 교훈과 층층시하의 가정 속에서 자라난 숙명적인 기질이 있는 여인이었다. 남편이 이마를 맞대고 늘 같이 지내면서 살아도 힘든 시집살이일턴데 하물며 매일같이 홀로 살아가는 시집살이로서야 그녀의 심정이 오죽했을까마는 이런저런 정한을 삼키면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었다. 한편 김우진의 인간적인 갈등은 ........ 윤심덕의 일생은 화려하고도 비참했고 행운과 수난이 뒤섞일만한 충분한 여지가 있었다. 천성적인 사교성과 성악가의 첨단을 걷는 여성 윤심덕을 아름다운 이상의 선망 속에 접근한 남성들이 결국 그녀의 꿈을 산산이 깨어지게 했다. 그가 한때 낙산부호 이용문과의 불미스런 염문으로 사회로부터 받은 그녀에 대한 좋지 못한 평판 또한 그녀를 절망하게 한 내적 상처이기도 했다. 이러한 방탕은 김우진을 한때 괴롭혔고, 또한 서로의 상통점에서 용서하고 결합하게 된 순간이라도 둘이 영원히 애인관계로 남게는 할 망정 가정을 꾸며서 살게 할 수 있는 부부관계는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이들이,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 얽매여 살기에는 서로의 개성이 너무나 뚜렷하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둘 다 우뚝 솟은 태양이었기 때문에 결코 결합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옛말에, 달도 차면 기울고, 십 년 세도 없다고 했고,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열기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식어지듯이 윤심덕과 김우진의 만남도 뜸해지기 시작했다. 미혼자도 아닌 유부남인 만석꾼 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우진은 평소 이러한 갈등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
일본에 도착한 윤심덕 자매는 오오사카의 강춘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예정된 레코드 취입도 마쳤다. 축음기 회사와 맺은 레코드 취입 계약은 동생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스물 여섯 곡만 부르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녀는 한 곡을 더 부르겠노라고 했다. 윤심덕의 이런 제의에 대하여 회사측으로서는 두 손을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윤심덕이 추가하여 한 곡 더 부르기로 한 노래의 곡명이 「사의 찬미」였다. 자신의 유작시에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푸른물결'을 멜로디로 한, 예정에 없던 곡을 그의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반주로 취입했다. 이날 「사의 찬미」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드냐
쓸쓸한 이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로 가느냐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웃는 저 꽃과 우짖는 뭇새가 그 운명이 모두 다 같으니
생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위에 춤추는 자이다
허영에 빠져서 날뛰는 인생아 너 속았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
윤심덕이 부르는 '사의 찬미' 원곡
이 노랫말은 윤심덕의 자작시라는 말도 있고 김우진이 지은 시라는 말도 있으나, 어찌되었건 20년대 페미시즘의 극치를 표현한 것이며, 이들은 이 노래대로 생을 정리했다고 느껴진다. 윤심덕은 레코드 취입을 마치고 귀국에 앞서 동경에 머물러 있는 김우진에게 전보를 쳤다. 당장 자기가 묵고 있는 강춘여관으로 달려오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다는 충격적인 전보 사연에 김우진은 만사를 뒤로하고 윤심덕한테 달려왔다. 김우진은 윤심덕과 함께 강춘여관에서 짧기만 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밤중에 부산으로 떠나는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에 몸을 실었다. 그때가 1926년 8월 3일, 음력으로는 그믐밤이었다. 해풍이 불어올 때마다 비릿한 갯내음과 찐득찐득한 기름냄새가 범벅되어 코 속을 역겹게 자극하였다. 이윽고 뱃고동과 함께 뱃머리는 바다를 향했다. 윤심덕은 김우진의 팔짱을 꼭 끼고 갑판으로 나갔다. 동경 유학이 시작되면서부터 이 뱃길은 수없이 오고갔지만 이날밤 만큼은 처음 가보는 뱃길처럼 느껴졌다. 밤이 깊어지면서 배는 점점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듯했고, 그때마다 두 사람은 이루지 못할 사랑에 대하여 솔직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놔두고 숨어서 사랑을 나누는 세상, 참으로 불공평해요. 이해가 안돼요!"
윤심덕의 울부짖음과 같은 하소연에 김우진은 담배 연기만 한참 동안 뿜어대다가
"그래, 맞아요. 참으로 무의미한 생명 연습이죠."
하며 윤심덕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시계를 보니 새벽 네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신을 벗어 나란히 놓았다. 두 사람은 눈을 지긋이 감고 가슴을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몸을 바다로 날렸다. 때마침 갑판에 나와 바람을 쏘이던 승객이 이 모습을 발견하고 선원에게 급히 알렸다. 두 사람의 시체를 건져 보려는 선원들의 노력은 새벽까지 이어졌지만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다. 오로지 흑조를 타고 그녀의 마지막 곡 「사의 찬미」만이 애절하게 들려오는 듯 했다.
1926년 8월 5일,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는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에 탔던 남녀 한 쌍이 대마도 앞 바다에 돌연하게 몸을 던져 정사한 기사를 사회면 톱으로 장식하여 세상을 온통 떠들썩하게 하였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현해탄에서 발생할 정사 사건만으로도 충격적인 뉴스가 되었겠지만, 그보다도 정사의 주인공 이 윤심덕(尹心悳)이었기 때문이다. 윤심덕 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성악가로 한창 명성을 날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뭇 남성들의 가슴을 애태우게 한 짝사랑의 대상 그 여성이 아니었던가.
그런 윤심덕이 목포의 갑부이자 유부남인 청년 문사와 사랑놀이를 하다가 끝내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현해탄 깊고 시린 물속으로 도피해 버렸다 하니 신문으로서는 당연히 사회면 톱 뉴스로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그때의 신문 스크랩 몇 장을 뒤적거려 보기로 하자.
-미성(美聲)의 주인공 윤심덕 양 청년문사와 투신정사-
그리고 다음과 같은 본문 기사를 실어 세상 사람들을 충격과 슬픔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관부연락선이 사일 오전 네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는데…… 남자는 김우진(金祐鎭)이요, 여자는 윤심덕(尹心悳)이었으며……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동아일보-
<사일 오전 네시경에 관부연락선에서 김수산이라는 남자와 윤수선이라는 여자가 정사를 하였다함은 보도와 같거니와 그후 김수산은 목포 부호 김모의 아들 김우진으로 판명되었고, 그 여자는 조선 악단의 총아 윤심덕으로 판명되었는 바…… 그는 칠월 십 육일 오오사카에 있는 일동축음기회사의 촉탁을 받아 가지고 그곳에서 축음기 레코오드에 소리를 넣기로 되어 있었는데……>
-조선일보-
윤심덕과 김우진의 현해탄 정사 사건은 연일 신문 기사화 되어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슬픔과 의혹을 안겨 주었는가 하면, 한 점 바람조차 없는 삼복염천의 후덥지근한 날씨만큼이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당시의 최고의 지성인이자 장래가 촉망되는 예술가로 알려진 윤심덕이 무슨 사연으로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졌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그녀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서양 음악의 성악을 전공한 소프라노 가수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비록 짧은 그녀의 생애였지만 그냥 묻어둘 수 만은 없을 것 같다.
참고문헌 : 송영, 이중훈(영남대 교수)/월간오디오 198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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