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가곡

연평도의 엘레지 '기다리는 마음' (김민부 시, 장일남 작곡) 1

내마음의노래 2024. 6. 1. 12:02

아내는 꽃행상을 나가고

나는 찬 술을 마신다


김민부 시인(1941-1972)의 시 「추일」은 이처럼 아름답게 시작된다.그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장일남의 가곡 「기다리는 마음」이 그의 작시다.

 

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작곡가 장일남 선생(1930년)은 황해도 해주 출생이다. 그는 1950년말 단신 월남하여 처음 1년간을 연평도에서 지내는데  맑은 날이면 연평도에서 빤히 보이는 고향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북에 두고온 어머니와 가족들을 찾아 귀향하리라 고대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 섬에 사는 한 문학청년을 만나 급격히 친해지게 되는데 바로 김민부 시인이다.
어느날 그 청년이 옛 우리말로 된 시가 적혀있는 헌 책을 들고 와서 장일남선생에게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제주도 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것이었다. 섬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이겠지만, 제주사람들에게도 옛부터 뭍으로 가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갖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제주도의 한 청년이 꿈에 그리던 뭍을 찾아 육지로 오게 되는데 그 곳은 지금의 목포이다. 청년은 언젠가는 섬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고 유달산 뒤 월출봉에 올라 제주도를 바라보면서 두고 온 여인을 그리워하는데 동시에 고향에 있는 청년의 여인도 간곳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며 매일같이 일출봉에 올라 육지를 바라보다 망부석이 되었다는 이야기

장일남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이 시의 내용에 빠져들게 된다.

"기다리는 마음"

이 시의 밑바탕에는 다음과 같은 애절한 사연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倭)국에 볼모로 잡혀 있던 왕자를 구하러 갔다가 왕자는 탈출시켰지만, 본인은 붙잡혀 왜국의 신하되기를 거부하다가 화형 당한 박제상. 그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서 망부석이 됐다는 아내. 시인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임’을 기다리는 망부석 설화를 가슴 적시는 시로 승화시켰다.

당시 장일남의 심정과 너무 잘 맞아 떨어진 것이었으리라. 10분만에 그 자리에서 시에다 곡을 붙였다. 이때가 1951년. 당시, 그후 임시 음악교사로 근무하던 연평도 종합중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향했다.
그는 평소에 문화방송과 줄을 대고 있었는데 당시 문화방송 스크립터였던 김민부가 장일남에게 좋은 곡이 있으면 하나 달라고 요청했고 장일남은 그때에 바로 그 "기다리는 마음"을 내놓았다. 김민부는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시인이었는데, 원전의 시를 그 자리에서 표준말로 번역하게 되고 그 것은 지금의 "기다리는 마음"의 가사가 되었다. 분단의 아픔을 갖고 있던 우리 국민들의 정서가 "기다림"으로 대변될 수 있었던 당시 상황에서 곡은 첫 전파를 타자마자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게 되고 "비목"과 더불어 장일남을 세상에 가장 크게 알린 곡이 되었다.

김민부(1941년) 부산출신으로 16세때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어떤 글을 쓰든지 습작 없이 바로 쓸 만큼 문학에 뛰어나 장일남은 그를 천재시인이라고 말했다. 김민부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장일남이 평생에 잊지 못할 사람중의 하나로 떠올린다. 장일남의 오페라 "원효대사"도 김민부가 가사를 썼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는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화상으로 세상을 뜨고 장일남의 회고에서 그는 세상을 비관하다 자살을 했다고 소개한다. 

 

이글은 월간조선 1987년 11월호를 정리하였습니다.

 

https://youtu.be/uIB0wW1IZKY

바리톤 김성길

 

https://youtu.be/1kkfAdt8EdE

테너 엄정행


김민부는 우리 시단에서 천재의 한사람으로 꼽는 시인이다.고등학교 시절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과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을 차지했으며 첫 시집 「항아리」를 출간해 당대 문단을 놀라게 했다.그가 첫시집 후기에 밝히고 있는 자신의 시 이론은 16세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쓴 것으로는 잘 믿기지 않는다.월반을 하고도 공동출제 중학입시에서 부산 최고의 점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한때 문화방송에서 근무하다가 시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의 극심한 갈등으로 31세의 이른 나이에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황혼을 바라보며 분신한 그의 마지막은 그가 보여준 절정의 표현이라고 전해진다.그가 생전에 남긴 거의 모든 시가 발굴돼 「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민예당간).그가 쓴 오페라 「원효」의 대본도 수록했다.국민학교 동창생으로 그의 요절을 늘 안타까워하던 조용우 전 국민일보회장,문학평론가 김천혜 교수(부산대),부산고 동문회 등 많은 사람이 오랜 시일에 걸쳐 수소문해 찾아낸 시편들이다.그의 두번째 시집 「나부와 새」는 세상에 단 두 권밖에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공원엔

개가 한 마리

가고 있었다

벤치엔

예수 같은 사나이가

빨래처럼 널려 있었고

사나이의

미간에

죽은 신문지 우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여자가 둘 있었다

죽어버린 여자와

잊어버린 여자가

어깨동무를 하고

누군가의

발자욱에 갇혀

울고 있었다(「은지화 Ⅱ」중에서)

김민부, 그의 시는 짧고 이미지가 강렬하다.생활 속에서 우러나오는 피곤한 정신의 오뇌를 때로는 퇴폐적인 자학의 언어로,때로는 탐미적인 세계관으로 드러낸다.바다를 「여자대학교의 기숙사 같은 거」라거나 「찻잔 속에 남은 죽음을 핥고 있다」와 같이 독특한 비유들이 눈길을 끈다.

서울아카데미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인 장일남씨는 그를 이렇게 회상한다.『돌아가신 이은상 선생은 김민부의 뛰어난 시재에 감탄해 자신에게 작사를 부탁하는 사람이 있으면 김민부에게 가라고 말씀하시곤 했다.이틀만에 15개의 작시를 부탁한 적도 있었는데 그의 작시는 적재적소에 맞는 천재적인 것이었다』

대학시절 그의 친구였던 이근배 시인은 『민부는 너무 일찍 신의 근처에서 어슬렁거렸다는 느낌을 뿌리칠 수 없다.그의 시는 세월이 흐를수록 명문이라는 인상을 준다』고 말했다. ( 국민일보 1995. 11. 03 인용)

 

노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우리가 사는 마을 뒷동산에 해도 띄우고 달도 띄우지만 노래를 바친 시인은 해만큼, 달만큼 살지 못한다.사람들은 제 슬픔, 제 기다림, 제 사랑을 한껏 목청에 실어 가곡 '기다리는 마음'을 부르지만 정작 그 시를 지은 이의 이름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시를 쓴 김민부는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한 수 위의 천재였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시집 '항아리'를 들고 나온 소년시인이었고 고등학교 3학년, 만 열여섯 나이로 195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균열'이 당선되었다. 그는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바로 서라벌대학 문예창작과에 들어와 맞부딪혔으니 그가 별 네개 쯤의 장성이라면 나는 일등병쯤 되는 계급의 차이가 있었다. 신춘문예당선도 부럽기 그지없지만 그 보다도 나는 그의 '균열'에 기가 죽어 있었다.


달이 오르면 배가 고파

배 고픈 바위는 말이 없어

할일 없이 꽃 같은 거

처녀 같은 거나

남몰래 제 어깨에다 새기고들 있었다

 

이렇게 첫 수를 여는 이 시조는 서정시를 잘 쓴다는 어느 기성시인의 솜씨도 넘어서는 것이어서 글재주로만 돌릴 수 없는 신운(神韻)같은 것이 팔딱거리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김민부는 깊숙한 눈과 이국적 마스크를 내세워 자신은 순국산품이 아닌 혼혈아라고 우리를 을러대기도 했다. 혼혈아가 천재라는 미신을 이용한 것이지만 한 반 친구들은 어느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일찍 피는 꽃은 일찍 시드는 것인가. 눈에 이상한 빛을 띠면서 "그것은 숱한 달빛이 착종하는 꽃밭이었다"고 시 '나부(裸婦)와 새'를 컴컴하게 읊어대고 쉬는 시간이면 잔디밭에서 미당의 시'입맞춤'을 "오락꼬 오락꼬 오락꼬만 그러면"하고 부산 사투리로 잘도 외던 그는 시 쓰기를 접고 MBC에서 방송작가로 열중한다.

한동안 서로 왕래가 끊겼던 68년 날씨가 추워질 무렵 뜻밖에도 김민부에게서 전화가 왔다. 차 한 잔을 하자고 북창동까지 찾아와서 마치 수줍은 소년처럼 풀잎 빛깔의 표지에 김상옥의 제자를 은박으로 찍은 시집 '나부(裸婦)와 새'를 슬며시 내민다.
"친구들끼리 저녁이라도 먹자"고 해 저녁 먹고 헤어질 때 그가 MBC정동 방송국 쪽을 향하여 뒷짐을 지고 휘적휘적 가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가 시인의 길로 돌아온 것을 환영하는 어떤 짓도 우리는 못해주고 그는 72년 가을 방문을 잠그고 스스로 석유난로를 엎어 시를 위한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했다.

"나는 앞으로 더 많이 외롭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위대한 미아가 되리라"는 그의 시집 후기가 그의 시에 자주 나오는 '죽음'과 더불어 어떤 예감을 갖게 한다.
천재시인은 신의 영역을 침범해서 일찍 데려간다던가. 그의 '기다리는 마음'은 제주도 성산일출봉에 돌비로 서서 이 아침에도 뜨는 해를 기다리리라.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은 임인가, 시인가, 시인인가. 
(중앙일보 2003-02-10 인용)